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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타인이 나의 도덕성을 일깨울 때

by 딘성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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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이 우리 내면에 촉발시킨 변화는 어쩌면 도덕적 이치를 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마주 보게 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닌 인간적인 유약함에 내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타고난 이기주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니, 적어도 나의 냉담함으로부터 벗어나,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되었다. 당신을 만난 일이 나의 도덕성을 깨어나게 한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가 한 노숙자와 부딪혔고, 그걸 계기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자기의 인생이 실패하게 된 얘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는 동정심이 생겨났고, 이제는 그에게 무관심한 채 가던 길을 가기가 어려워졌다. 이 만남은 나에게만 쏠려있던 마음의 방향을 바꿨다. 타인이란 존재가 돌연 내 생각 속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우선 나는 그가 지하철에서 자는지 아니면 길거리 한복판에서 자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에게 돈이나 샌드위치를 주는 게 나을지, 아니면 더 좋은 음식을 사줘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정말 갑작스럽게, 나는 그에 대해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런 상황에 대해 단호한 정의를 내렸다. "누군가에게 대답을 한다는 것, 그것은 이미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책임감은 우리가 타인과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가벼운 종류의 요구도 그보다 더 무게감 있는 요청을 담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길에서 노숙자가 말을 걸 때 왜 대답을 회피하려고 하는지 스스로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관련된 '정언 명령(칸트 철학에 있어서, 행위 그 자체가 선이므로 무조건 수행해야 하는 도덕적인 명령을 말한다. -역주)'의 핵심에는 '유대 그리스도교'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이 문화는 종종 너무나 일반적이고 너무나 추상적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모든 인간은 공통적인 인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하는 행동에 상관없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칸트의 철학에서도 이런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타인이 지닌 인간성은 항상 "하나의 목표로 받아들여야 하며 단순히 하나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우리가 타인을 대할 때 언제나 그를 한 사람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대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우리와 그가 이해관계-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동료이거나 직원, 혹은 손님이므-로 얽힌 사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타인과 실제로 만나지 않고서는, 타인에 대한 존중이 담긴 이 정언 명령은 그저 허울뿐인 약속이나 종교 서약처럼 형식적인 것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레비나스가 분명하게 정의했던 진정한 도덕적 명령은 신으로부터 연유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타인에게서, 그리고 타인의 존재로부터 나온다. 종종 이런 타인은 나에게 말 한마디조차 할 필요가 없지만, 내 앞에 엄연히 자리 잡고 있다. 불안정하고 연약한 데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니면서 말이다. 내가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하다. 그가 지닌 인간적인 연약함이 나에게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의 피부에 대해 아주 아름다운 표현을 남겼는데, 그것은 "인간의 피부는 방어막이 없다"라는 말이다. 실제로 인간의 피부는 다른 포유류의 피부보다 훨씬 더 얇고 섬세하다. 그래서 단순히 육체적인 면에서 볼 때, 어든 1명의 인간을 죽게 하는 것은 무척 쉬운 일이다. 한편 모든 도덕적인 명령 중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명령인 '살인하지 말라'라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즉 나와 마주하고 있는 타인이 실제로 존재할 때, 나를 향해 자기의 얼굴을 보이고 있는 타인이 실제로 존재할 때가 그 경우이다. 왜냐하면 그 타인은 나로 하여금 그의 앞으로의 삶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해 레비나스는 "인질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말까지 언급했다. 그를 만나면서부터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된다. 우리에게는 그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인질에 대한 책임감이란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이렇게 나에게 저절로 굴러온 책임감은 나의 진정한 도덕성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결국 "곤란한 자유"-레비나스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한-는 나에게 속한 것이고, 나를 온전히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내 자신을 목격하는 일은 오직 타인의 세계에 도달할 때 가능해진다." 이 말은 타인과의 만남이 우리를 우리의 인간성과 같은 높이로 이끌어주고, 타인을 향한 우리 존재의 수준을 높이 끌어올려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비나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얼굴'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사실 이 '얼굴'이라는 단어는, 나와 마주한 채 드러나 있는 타인의 육체에 대한 총체성을 자칭한다고 할 수 있다. 즉 타인의 '얼굴'은 내가 그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타인의 전부'이다. 사형수의 얼굴은 사형이 집행되는 시간에 복면이나 장막에 덮여 가려진다.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형리가 살인을 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형리는 그의 인간성과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쟁터에서도 사람의 얼굴로 인해 다소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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