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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타인이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꿔줄 때

by 딘성 2022.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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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성의 경험은 이르게, 혹은 뒤늦게 어떤 결과들을 만들어내며 끝난다. 타자성의 경험을 통해 나는 당신의 관점을 알게 되고, 당신과의 접촉 덕분에 변화한다. 나는 당신을 만남으로써 새로운 길로 들어섰고 내 습관들 몇 개를 고쳤으며, 내 의견들 중 일부를 수정했다. 이 만남 덕분에 내 취향 역시 진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된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변화한 것이다. 더 나은 쪽으로 변화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내가 당신을 만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내 존재의 조각배를 다른 곳으로 끌게 되었다. 작가 알베르 카뮈는 여배우 마리아 카자레스를 만난 뒤 두 사람이 12년간 교류하며 쏟았던 열정이 얼마나 자신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수차례 강조하곤 했다. 배우이자 스페인 국무총리의 딸이었던 마리아 카자레스는 프랑코 독재 정권이 고국을 점령하자 프랑스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녀는 미셸 부케와 장 빌라르, 제라르 필립과 같은 유명한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카뮈와 마리아가 주고받은 천 페이지가 넘는 서신들을 흝어보면, 카뮈가 그녀에게서 '수많은 가능성들'-한없이 다정한 성향을 갖는 것, 여러 갈래로 흩어지지 않고 한 사람에게 몰두할 수 있는 집중력을 갖는 것, 삶에 대해 항상 긍정하는 사고방식을 지니는 것-을 발견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 카자레스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도 그 가능성들을 실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1994년 6월 6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날에 이루어졌다. 카뮈는 그날의 만남에 대해,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일으켜 세워준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카뮈는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당신이란 사람은 내가 긍지를 느끼지 못하던 내 삶에 우연히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무엇인가가 변하기 시작했죠. 나는 일상에서 더 편안히 호흡하게 되었고 세상만사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 자유롭게 찬미하게 됐어요. 당신 앞에 설 때, 또 당신이란 존재의 바깥에 있을 때 나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됐습니다. 당신이 가끔 놀리곤 했던 내 능력은 단지 외로운 능력이고 부정적인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그 능력보다 더 많은 것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죠. 아마도 그래서 내 사랑의 감정에 항상 크나큰 고마움의 감정이 깃드나 봅니다." 그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들을 흝어보게 되면, 두 사람의 만남에 비추어 카뮈의 특정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특히 『반항적인 인간』은 그들이 처음 사랑의 열정을 나누었던 연애 초기에 쓰인 작품인데, 집필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51년에 출판되었다. 이 작품 속에서 반항적인 인간은 불의를 보거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목격할 때 '아니요'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자기의 이름을 걸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들의 총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아니요'라고 말한다. 즉 그는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그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카뮈는 이런 말을 했다. "한 사람의 노예는 만인의 이름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다." 그는 불의에 대해 이렇게 부정을 하는 것은 삶에 대한 무궁무진한 긍정을 항상 동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즉 반항적인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해 거부하면서,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방향의 삶에 대해서는 승낙한다. 그러므로 그가 지닌 거부의 힘은 그와 동시에 승낙의 힘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허무주의자는 사실 반항적인 인간이 아닌 것이다. 카뮈와 마리아 카자레스의 만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카뮈가 말했던 반항적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니요'의 인간형으로, 거절과 거부의 형상으로만 만들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철학자, 그토록 귀하고 심오한 정신을 지닌 이 안내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뮈는 마리아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빚진 것이 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내가 갑자기 내 모든 열정의 힘을 오직 한 사람에게만 쏟아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그 열정을 아무에게나 무작정 흘려보냈거든요. 어떤 경우에서든 말입니다." 사실 이 작가에게는 소위 '바람둥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수많은 여자들과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500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던 여성은 단 한 사람, 마리아 카자레스였다. 다른 여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마리아와 교류했던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그녀들을 만나지 않았다. 즉 그는 마리아와의 접촉을 통해 진정으로 변화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예전에 자기가 지닌 열정의 힘을 아무 곳에나 흘려보냈다고 그녀에게 고백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열정을 분산시키지 않은 채, 자신에게 소중한 한 사람에게만 정성을 기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터득했다. 자아도취증이 있는 사람들을 자기가 쟁취한 이성들을 목록에 한 명씩 추가하는 일이 즐거움의 원천일지 모른다. 하지만 카뮈는 마리아 카자레스를 통해, 그런 정복적인 사랑과는 다른 유형의 사랑을 발견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타인 쪽으로 더 많이 기운 사랑이었다. 즉 자기가 지속적으로 정착할 수 있고, 단순한 즐거움에만 그치지 않는 어떤 진정한 행복을 길러내는 사랑을 찾은 것이다. 자신을 발견하고 또 타인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렇듯 지속 가능한 시간성의 가치가 필요하다. 또한 카뮈와 마리아가 주고받았던 아름답기 그지없는 편지들은 오늘날 우리가 잡담을 나누며 자주 확인하게 되는 애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사실 이제는 서로 먼 곳에 있는 연인들도 연애를 이어가는 게 가능해졌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거나 둘이 직접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계속 연락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알베르 카뮈와 마리아 카자레스의 경우에도, 이 두 사람이 함께 보낸 모든 사랑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면, 아마 서로 얼굴을 직접 본 순간보다 서로에게 편지를 쓴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 연인은 편지를 쓰며 둘이 함께했던 순간들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도 하고 흥미로운 점을 덧붙이기도 했다가, 과거의 이야기를 부분적으로 상상해서 지어내기까지 했다. 이것을 통해 편지로 사랑을 속삭이는 일도 직접 만나는 일 못지않게 열렬한 기쁨을 선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을 하나 떠올려 보자면, 모든 여자들을 유혹하는 바람둥이 캐릭터의 대명사 동 주앙이 있다. 그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유혹한 모든 여자들 중 그 어떤 여자와도 진정으로 만났다고 할 수 없다. 카뮈가 어느 정도 그런 면모를 보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동 주앙과는 다르다. 동 주앙 같은 호색한에게 있어서는 모든 여자들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여자들은 그저 동 중앙이 자기 자신을 비춰보면 자신의 모습에 감탄하게 되는 똑같은 거울을 그에게 내밀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호색한 사랑에 대한 두려움, 진정한 만남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의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를 가정해 본다면, 그는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자신이 다른 누군가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그는 만남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단지 고유한 자기 자신으로 남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정에 대한 근사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친구란 단지 우리가 기댈 수 있거나 우리가 자신의 의혹과 두려움을 털어놓는 존재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친구란 하나의 기회-'카이로스kairos'-라고 할 수 있다. 이 기회 덕분에 우리의 잠재적인 재능들은 꽃을 피울 수 있게 되고, 이 기회 덕분에 우리의 '능력'은 효과를 거두며 '현실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에게 있어 이 능력은 그전에는 단지 가능성의 영역으로만 여겨졌던 것인데 말이다. 사실 우리는 친구와 경쟁관계까지 될 수 있고 혹은 그저 대수롭지 않은 방식으로 그를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이어가는 관계가 우리 자신을 발전하게 만들어준다면 그 사람은 우리의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교수의 강의들이 우리 내면의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망이라든가, 아니면 우리가 전에 고려하지도 않았던 새로운 길로 들어서고자 하는 갈망을 일깨워 주었다면 그는 우리의 친구이다. 어떤 치료사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계속 괴롭혔던 증상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면 그도 우리의 친구이다. 어떤 동료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에게 의지하여 위기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고 다시 기운을 내도록 도와주었다면 그도 역시 우리의 친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했던 '친구'의 의미로 되짚어볼 때, 우리의 연인도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카뮈 역시 마리아를 통해서 진정한 만남을 인식했다. 그녀는 그가 전진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가 자기의 삶에 대해 더 큰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으며, 사람에 대해 금방 싫증 내는 그의 성향을 잠재워 주고 오히려 경탄의 마음을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물론 누군가에 대해 경탄하는 감정이 지닌 위력은 이미 그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마리아와의 만남을 통해 그 재능은 "현실에서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던 단어를 그대로 이용하자면 말이다. 카뮈는 단지 마리아의 세계가 지닌 시야에만 마음을 열었던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더 발전시켜 주었다. 우리가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변화하게 된다면, 우리는 진정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얼마나 그들이 간절히 필요했었는지를 확실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두려움과 불안이 담긴 이런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기까지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사람들을 영영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완성하지 못한 채 불완전한 채로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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