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만남의 징후들:타인의 얼굴과 마주하기

by 딘성 2022. 8. 22.
반응형

적군이 쓰고 있는 철모가 그의 죽음을 부추기는 매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적군이 철모를 안 쓰고 있어서 내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의 인간성을 알아본다면, 나는 잠시 망설이게 되고 그 순간 그를 죽일 수 있는 내 능력에 구멍이 생긴다. 전쟁이 끝난 후에 군인들이 겪는 정신적인 외상은 대개 이런 것에서 연유한다. 그들은 종종 적군의 얼굴이나 겁에 질린 눈빛을 흘깃 볼 틈이 생겼을 것이고 적군의 목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몇 초도 안되는 순간이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죽였던 희생자를 보았고, 그 얼굴들의 이미지와 목소리가 뇌리에 계속 남아있다. 결국 그 얼굴들은 군인들로 하여금, 전쟁터에서 저지른 자기들의 행동이 최고의 도덕적 명령인 '살인하지 말라'와 정면충돌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만다. 레비나스는 사람들이 흔히 쓰는 공손한 표현 "먼저 하세요"에서, 그 문장 자체에 도덕적인 태도가 담겨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우리가 보통 겉치레로 인식하고 있는 '예의'라는 것이 바로 도덕성의 시작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노숙자와의 만남을 다시 예로 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에게 예의를 보이는 일은 이미 그를 돌봐주려는 자세를 갖추었다는 뜻이고, 부분적으로나마 그에게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그의 얼굴과 마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책임감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 유명한 작품, 뭉크의 <절규>가 그토록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이 그림 속 남자의 얼굴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 공포에 질려있는데, 그 얼굴은 단순히 우리가 그 사람의 고통스러운 외침과 마주하게 만드는 것 이상의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싸고 있다. 더 이상 세상의 소리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존재가 지니는 무게도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이제 곧, 다리 아래로 투신할지도 모른다. 이 외침은 하나의 간절한 부름이다. 이 얼굴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우리의 고통은 적어도, 우리 자신이 느끼는 책임감과 더불어 그의 비참한 고뇌로부터 연유한다. 내 얘기를 잠시 하자면, 나는 교수로서의 내 책임감을 받아들이기 위해 만남의 필요성을 자주 느끼곤 한다. 내가 학생들에게 주는 점수라든가, 학생 평가서에 기재하는 내 소견이 학생들의 장래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미래의 문을 열어주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문을 닫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학생들과 만날 일이 종종 생기더라도, 대개는 만남을 이어가는 우리 사이에 어떤 특별한 연결 고리 없이 한 해가 훌쩍 흘러가버리곤 했다. 이런 학생의 평가서를 작성할 때 나는 최대한 객관적이고 신속한 방식으로 그 학생에 대한 소견을 적어 넣었다. 마치 나의 책임감을 훌훌 떨치기 위해서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학생의 앞날에 해를 입히지 않으려고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이 학생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더 이상 그를 도와줄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학생과의 진정한 만남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나와 그 학생이 공동 작업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낼 때였는데, 그 일을 하며 우리는 서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그의 학교 성적과 상관없이 나는 그 학생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으며, 완전히 몰입한 상태로 그의 평가서에 내 소견을 기재했다. 나는 최대한 그에게 잘 들어맞는 단어를 고르고 또 골랐으며, 그를 칭찬하는 부분에서는 더 적합한 말들을 고르느라 애썼다. 실제로 나는 내가 그의 장래에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런 일화는 프랑스의 이념인 평등의 원칙에 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정말이지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그 특별한 학생을 만났을 때였다. 내가 지녔던 유일한 직업적인 양심조차 그 특별한 만남의 경험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오늘날 우리가 생태학적 문제의식을 자각하는 일에 있어서, 종종 방해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내 책임감을 자각하는 데 타인이라는 존재와 타인과의 만남이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가정해 보자. 가령 우리가 육류를 과잉 섭취하는 것 때문에 사료콩 콩이 많이 필요해지고, 이 때문에 콩을 지배하기 위한 산림 벌채가 대규모로 이루어진다면, 그 벌채로 인해 위협감을 느끼며 아마존 우림 한복판에 살고 있는 한 남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지, 그리고 매일매일 기후 온난화의 효과를 목격하고 있는 데다, 빙하에 살고 있는 북극곰과 바다코끼리, 바다표범, 바다 새들이 멸종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에스키모족들에 대해서는 어떤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지, 생태학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 중대한 이유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그 모든 문제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서 태어날 미래의 아이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미래 세대의 아이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우리가 아직 만나지도 않은 그 인간 존재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우리가 아직 만나지도 않은 그 인간 존재들, 그래서 우리가 그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카뮈의 소설 『전락』은 자신의 의무와의 만남에서 실패를 경험한, 파리의 한 전직 변호사의 이야기이다. 길이가 무척 짧고 극도로 어두운 분위기를 띤 독백체의 이 소설은 회한과 우울증으로 가득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어느 날 밤 장-바티스트 클라망스는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예술의 다리' 밑에 투신한 어느 젊은 아가씨를 목격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구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전락은 육체적인 몰락과 더불어 도덕적인 몰락도 의미한다. 그리고 그의 전락은 그 운명적인 밤에 일어난 사건의 탓을 자신의 과거로 돌리게 만든다. 즉 그는 자기애로 가득한 출세주의자로 보냈던 삶의 시간들을 되돌아본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사건 속의 어떤 짧은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그 젊은 아가씨와 실제로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사실 그는 사람의 몸이 강에 첨벙 빠지는 소리와 아주 흡사한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를 듣기 직전 그녀와 슬쩍 마주쳤을 뿐이었다. 그는 주변에 구조를 요청하지 않고 계속 길을 걸었는데, 그 아가씨의 유령만큼이나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던 것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그저 유령일 뿐이다. 그가 그녀의 얼굴을 못 보았고 그녀의 시선과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렙비나스가 말했던 맥락에서 볼 때 그는 그녀와 만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그는 그녀에 대한 완전한 책임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면, 그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반응하며 그녀의 자살행위를 막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생명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녀처럼 막막한 상황에 처했던 자기의 삶도 구원했을지 모를 일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