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만남의 징후들:차이를 탐험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

by 딘성 2022. 8. 15.
반응형

사랑이나 우정으로 연결된 어떤 만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타인을, 그가 지닌 타자성을 통해 그의 방향 쪽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랑의 주된 적군, 즉 내가 무찔러야 할 것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나'라는 존재는 상대와의 차이점에 대항해서 항상 내 정체성을 세우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차이점이라는 투명한 프리즘 속에서 걸러지고 다시 지어진 세계에 대항해서 자기의 세계를 강요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 만남이 이 세상에 대한 나의 시각을 변화시키지 못했다면, 또한 내가 나의 '자아'에 너무나 매달려서 예전과 똑같이 세상을 바라본다면,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만난 것이 아니다.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내가 수년째 당신과 같이 살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당신이 지닌 타자성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바디우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사랑'이란 것은 실존과 관련된 명제이다. 즉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난 어떤 관점을 이용해 하나의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만나게 될 때, 나는 혼자만의 자각으로 세상을 경험할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경험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그렇게 되면 나만의 단독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이 세상과 만물이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사랑은 언제나 한 세계의 탄생에 참여하게 해주는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디우는 타인의 시각을 통해 보이고 자각되며 받아들여지는 세계에 대해서도 환기하고 있다. 나는 타인의 관점에 접근하자마자, 비록 그것이 부분적일지라도 한 세계의 탄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은 아마도 세계에 대해 내 존재가 지니고 있는 의식까지 깨어나게 한다. 이 세계란 우리가 지닌 의식의 차이를 넘어서, 우리 둘 모두가 살고 있는 그 세계를 말한다. 만약 사랑이 '하나의 건축'이라면 그 사랑은 만남이 그 모든 위력을 발휘하며 지속되는 시간 속에 존재한다. 즉 진정한 경탄은 맨 처음 서로 첫눈에 반했던 그 순간보다, 상대방이 지닌 '나와의 차이를 탐험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 속에서 더 많이 느끼게 되는 법이다. 또한 상대방 역시 나처럼 세상의 풍요로움을 관찰하는 한 지점이자 주체이며 하나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놀라워하면서 진정한 경탄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에 대해 사유한 후 '연속적 창조론'을 세상에 내놓았다. 신은 모든 만물을 위해 세상을 한 번 창조한 것에 그치지 않고 끝없이 세상을 재 창조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만남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타인과의 만남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한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계속해서, 사랑을 받기 위한 만남을 위해 달려가고, 타인의 타자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깊이 있게 만들기 위해 달려간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랑 이야기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지지 않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사랑받는 상대방과 나의 차이를 탐험함으로써 더 활짝 펼쳐지고 더 확대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만남은 또 다른 만남을 이어지게 하는 초대장이 된다. 내가 상대방의 신비로움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 신비로움은 더욱 그 실체를 숨기게 마련이다. 또한 타인은 완전한 타자성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내가 그 타인에 대해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들은 나로부터 벗어나는 그 타자성에 대한 매혹을 더 커지게 만들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은 이렇게 전개된다. 타인에 대한 신비로움은 줄어들기도 하고(나는 점점 당신을 더 잘 알게 되므로), 그와 동시에 늘어나기도 한다(당신이 지닌 신비로움은 당신을 알아가는 내 인식에 저항하는 속성을 지니므로). 여기서 다시 강조하고 넘어가자. 만남이 지닌 마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접근 방법을 뛰어넘어야 한다. 타인이 지닌 차이에 대한 탐험이라든가 하나의 '건축'으로서의 사랑의 개념은 우리가 '용해되는'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아주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용해되는 사랑'은 주로 청소년기에 상대를 이상화하는 감정에서 비롯되곤 한다. 그때의 우리는 각자 독립된 두 사람으로 지내는 것보다, 즉 하루하루 지날수록 상대방이 얼마나 나와 다른지 헤아려보는 것보다, 오직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고 하나의 커플로 용해되기를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우리가 같은 것을 느끼길 바라고, 같은 욕망과 취향을 갖길 바라고, 같은 생활을 영위하기를 바라며, 어디서나 우리가 함께 하기를 바라고, 심지어는 항상 같은 파장의 감정을 갖기를 바란다. 즉 우리는 사랑을 최고의 형태로 구체화하기 위해 사랑의 용해를 꿈꾸게 된다. 예를 들어 이제 '나'라고 말하는 것 대신에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우리는 그 영화가 정말 실망스러웠어요."라는 식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또 사람들에게 우리를 소개할 때, 두 사람의 개인이 아닌 한 쌍의 커플로 소개를 한다. 그리고 둘이 하나가 되는 용해의 감정이 무척 아름답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혼자일 때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서로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한 개인에 대한 관심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다고 여겨지는 그 사람 자신이 되는 데서 시작된다. 즉 유일한 하나의 존재로서 그가 지닌 신비로움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인이 타인의 존재 속에서 녹아버리고 한 쌍의 커플 속으로 자취를 감춰버린다면,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는 독특한 개성을 잃어버리고 냉철한 비판의 시선도 사라지며 자기만의 매력까지 사그라진다.게다가 그런 용해 작용은 아주 흔히, 불균형까지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즉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보다 더 많이 용해되어 자기의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며 그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사라지는 일은 종종 그의 '동의'를 통해 이루어지곤 한다. 커플을 이루고 있는 그가 더 이상 그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면, 또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상대방에 대해 그가 너무 많이 의존하게 된다면, 그 커플은 불행한 소멸 현상을 더 크게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용해되는 이런 사랑에 반대하며, 그런 사랑이 가져다줄지 모르는 폐해에 맞서서, 사랑에 대한 훨씬 더 현대적인 비전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꽤 낭만적인 것이기도 하다. 비록 이 비전에는 두 사람의 완전한 용해를 통해 한 사람이 자기를 내던지거나 망각하는 그런 열정적인 낭만성이 들어있지 않지만, 매일매일 타인이 주는 신비로움 앞에서 새롭게 느끼는 감탄이 들어있기에, 전자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사랑에는 타인이 그 사람 자체로 남아있게 된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동의 삶과 우리의 습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친밀함과 동반자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또한 내가 그에게 쏟아붓는 그 모든 사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다음과 같은 말들을 할 때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자칭할 때 마치 우리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커플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표현들이 그것이다. 또 개인의 근사한 차이점을 부정할 우려가 있는, '우리'라는 단어 자체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타인이 지닌 타자성이라는 보물을 가능한 한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람들이 다소 왜곡해서 쓰는 '우리'라는 대명사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든 반감을 갖고 있든지에 상관없이, 어쨌든 타자성의 고유한 광채가 흐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랑'이란 것이 우리의 차이점들이 사라져 버리는 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차이점들이 그 안에서 당당한 권리를 갖고 있고 존중받고 탐구되며 사랑까지 받는 아늑한 전당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 비친 아이오와의 다리들을 로버트의 시선으로 계속 바라보았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한 쌍의 연인이 되지 못했고 황홀한 일탈의 경험을 한 후에 서로 헤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용해되어' 사라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서 상대가 부재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은 여전히 상대방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모습으로 바치고 있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