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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우리는 미지의 존재를 갈망한다

by 딘성 2022. 8.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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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이런 미지의 존재를 갈망하지만, 그 갈망은 사람을 도취시키기도 하고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는 타인 쪽으로 우리를 인도하기도 하고, 낯선 우리 자신의 일부 쪽으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만남에는 동시에 생겨나는 두 종류의 만남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타자성이 지배하는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내면의 도사리고 있는 타자성이 지배하는 만남이다. 시인 랭보는 1871년에 폴 드메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을 적었다. "나는 한 명의 타인이다" 그런데 내가 타인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는 느끼기 위해서는 타인을 반드시 만나야만 한다. 낯선 타인에게서 타자적인 모습을 맞닥뜨리게 됐을 때, 비로소 나는 내 안에 '남들과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그런 다른 모습이 자신이 현재 믿고 있는 것보다 많이, 실제의 내 모습에 가깝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생겨나는 감정의 동요와 그것의 위력을 스크린에 담은 바 있다.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동명의 영화로 만든 것인데, 여기서 여배우 메릴 스트립은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평범한 가정주부 프란체스카로 등장한다. 미국 아이오와주에 정착한 지 수십 년이 된 그녀는 남편과 더불어, 이제 막 청소년이 된 두 자녀들과 살고 있다. 어느 날 남편과 아이들이 소 품평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떠나고 그녀는 나흘 동안 농가에 혼자 머문다. 한편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의 사진작가였던 로버트는 아이오와주의 목조 다리들에 대한 탐방 기사를 쓰기 위해 프란체스카의 동네에 왔다가 그녀를 마주친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곧 사랑에 빠지고 자기들의 존재를 바꾸게 될 열정을 경험한다.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마치 인생 전체를 요약한 것 같은 정열적인 시간을 보낸다. 그럼에도 프란체스카는 가슴을 에는 듯한 괴로운 망설임 끝에 가정을 버리지 않기로, 로버트를 혼자 떠나보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공유했던 모든 것들은 평생 그녀의 기억 속을 떠나지 않는다. 농가에서 로버트와 함께 보냈던 모든 '자잘한 추억들'의 시간은 매일매일 그녀의 삶을 보듬어주는 자양분이 된다. 프란체스카가 마치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 감정은 그녀가 아이오와주에 정착하게 되면서 뒤로 훌쩍 밀어놓았던 젊은 시절의 꿈과 같은 연애 감정이었다. 로버트와 헤어진 후로 오랜 세월이 흘러서 유언을 작성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로버트의 유해가 뿌려진 곳에 자신의 유해를 뿌려달라는 말을 남긴다. 그 장소는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바로 그 다리였다. 함께 보냈던 이 시간의 한복판에서, 프란체스카는 다음과 같은 말로 만남의 핵심을 표현한다. 이 말은 나흘 내내 그녀를 따라다녔던 감정적인 동요를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 진정한 내 자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여기서 나타나는 감정의 동요는 순수한 현기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취했던 행동들은 그녀의 평소 모습과 -선함적으로 볼 때-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그녀는 딱히 원망할 구석이 없는 자기 남편을 배반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옆에서 삶의 지루한 일과를 반복하면서, 자기 존재가 흐려지고 자기의 본래 모습도 조금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 자기 삶이 퇴색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때 찾아온 로버트와의 만남은 일상의 그 지루한 감정들보다 훨씬 더 강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를 별안간 덮쳐버린 거대한 파도에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그녀의 젊은 시절과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그녀의 유머 감각, 그녀의 여성성, 그녀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던 삶을 향한 강한 의지가 모두 되살아났다. 그녀가 오랫동안 자신에 대해 잊고 지냈던 모든 것들, 즉 '세밀하고 자잘한 삶의 결'과 일상의 소중한 무게감이 다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게다가 이것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렬한 상태로 그녀의 삶에 갑작스럽게 돌아왔다. 왜냐하면 그녀가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남자의 두 눈동자가 그녀에게 찬찬히 머물렀으며 그녀라는 존재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르네 샤르는 자신의 자서 『모여있는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공동의 세계 밖에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기를 바란다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엄청난 배고픔까지 감수한 상태로,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해야 한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만을 위한 행동이다." 이 문장은 만남이 가져다주는 동요를 아름답게 정의한 말이다. 비록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녀를 새롭게 만들어주었던 것을 만남이 던져준 동요였다. 즉 그녀는 나흘이라는 시간 동안, 주부로서의 삶 속에서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벗어나 '그녀 자신의 바깥으로' 나아가서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또한 그녀는 나중에 후회의 눈물을 펑펑 쏟을지도 모르는 위험 부담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해서 르네 샤르가 말했던 "공동의 세계 밖에서의 무엇"이 실제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파장의 충격은 두 사람 모두에게, 죽는 날까지 퍼지게 될 거대한 파도 같은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진정한 삶이 용솟음치는 모습과도 매우 비슷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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