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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우리가 함께 완성해 낼 그 무엇

by 딘성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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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연주하는 어느 그룹에 통용되던 이 진실은 다른 일반적인 커플들에 있어서도 당연히 적용된다. 사랑으로 결합된 만남들이 어떤 동요라든가 익숙한 느낌, 혹은 타인에 대한 기분 좋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면, 그 만남들은 확장될 수도 있고 새로운 바람의 방향을 찾을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진실까지도 찾을 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개성과 관심사들,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삶의 안락함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우리의 습관이 주는 편안함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살거나 하나의 가족을 만든다는 인식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 큰 불안감을 주며, 때로는 그저 누군가의 들러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까지 들 때가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거나 가족을 이룬다는 생각은 여러 종류의 구속감과 책임감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떠맡을 생각이 없었던 무거운 책임감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꽤 괜찮은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모든 부정적인 예감들은 돌연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스스로 억제하고 있었던 것들이 용감하게 고개를 들고, 우리가 지녔던 두려움이 증발해 버리기도 하며, 우리를 억누르던 불안감이 흩어져 버린다. 때때로 이런 변화는 거의 즉각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이렇게 새로이 피어나는 자유의 감정이 바로, 만남을 의미하는 하나의 징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모험을 감행해야겠다는 욕망을 품는다. 우리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괜찮은 누군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모험에 과감하게 몸을 던지는 일은 불안감을 준다기보다 흥미진진한 자극을 준다. 그럴 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를 세상과 마주한 개인의 영역으로만 축소시켜서 생각하며 자신을 기만했는지 깨닫게 된다. 내가 그동안 누군가와의  만남에 용기 있게 뛰어들지 못하고 두려워했던 까닭은 지금껏 세상과 나만 보았기 때문이고, 내 책임감과 나만 보았기 때문이며, 내 불안감과 나만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본질적인 것들이 내 바깥에서부터 내 안쪽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고, 인간이라는 동물의 진정한 본질-서로 서로 관계를 맺는-을 잊고 있었다. 또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어떤 재능이나 장점들, 용기 같은 것들이 아니라 단지 당신이란 존재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즉 내가 아닌 어떤 존재, 그 존재가 없이는 나라는 존재를 완성시킬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당신이었다. 그런데 하나의 만남이 실현되자마자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아니고 내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도 아니다. 우리가 함께 무엇을 완성하게 될 것인지가 중요하다. 둘이서 공동으로 만들어 낼 결과물의 가능성을 내가 느끼는 순간부터, 나는 자신에 대해 이로운 간격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즉 나의 이력이라든가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두려움, 불안감 등과 거리를 두게 될 것인데, 아마도 나와 만난 당신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1+1=3'이라는 등식에 작용하는 마법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까지 내다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왜냐하면 A가 B를 만나고 A와 B가 함께 존재하고 있다면 이 만남은 'A+B'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의 미래를 여는 일이다. 바로 그 만남의 순간에 나는 날개가 생긴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된다.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자면, 나는 예전에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고 다녔다. 하지만 그때는 아직 당신을 만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당신에게서 태어나는 아이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다른 특별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당신과 함께 아이를 갖는 일은 인생의 모든 것들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함께 책임을 질 것이고 함께 구속감을 받아들일 것이며 함께 부모가 될 것이다. 그때 느끼는 감정은 무거운 부담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모험과 더 흡사하다. 당신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내 안에 자유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느끼지 못했던 그런 힘이다. 온갖 종류의 문제들과 두려움은 이제부터 단지 나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이'의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그동안 내 도시나 내 고장을 떠나는 것을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나는 이제부터 당신과 함께 다른 곳에 가서 살 계획을 세우게 되고, 거기서 우리의 아이를 키울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만남이 불러온 결과이고, 우리가 새로 세우게 될 계획들 역시 그 만남의 징조들이다. 물론 함께 아이를 갖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반드시 진정한 만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19세기에는 처음 만나자마자 아이를 갖는 커플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도 아무렇지 않게 혼외정사를 이어가곤 했다. 또 오늘날 우리는 의학적인 도움을 받아 인공수정 방식으로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 부부가 되겠다는 계획이 전혀 없더라도, 또 정자의 '기증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아도 그런 결정은 실행 가능한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하나의 만남이 자기 아이에 대한 갈망을 생겨나게 할 때, 그리고 둘이 함께할 계획을 세워서 그것을 실현 가능하게 만들게 될 때, 우리의 가슴속에 켜진 이 뜨거운 불은 만남 그 자체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줄 것이다. 즉 '1+1=3'이라는 가능성의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만남의 위력이 퍼지기 시작하기 전이 아닌, 그 위력이 활활 타오르는 중앙에 존재한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하나의 만남이 그 결실을 맺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맨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순간을, 그때 느꼈던 최초의 열렬한 흥분감을 다시 회상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은 이제 우리에게 있어, 미래의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수 있는 최초의 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콘서트에서 수만 명의 관객들이 자기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땀에 흠뻑 젖어 노래하던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가 될 수 있다. 또 우리는 자기들의 아이들이 자라고 나중에는 자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을 보게 될 세상의 모든 부모들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가슴은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기쁨으로 빛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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