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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엘뤼아르와 피카소, 지고의 우정

by 딘성 2022.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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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자신의 세계를 온전히 완성한 예술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규범을 벗어난 작품들을 남겼던 이 창조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할 때 잘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힘의 형체를 자신의 창작으로 구체화시켰다. 어쩌면 그 힘은 다른 사람 덕분에 얻게 된 힘 일지도 모른다. 사실 피카소가 시인 엘뤼아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지금과 같은 위상의 화가로 남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그의 삶과 작품 세계도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피카소와 엘뤼아르 사이에 피어났던 이 '지고의 우정'에 관해 알게 된다면 -특히 엘뤼아르의 역할에 집중해서- 우정으로 이어진 만남 역시, 사랑으로 이어진 만남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의 또 다른 차원을 열어서 보여주는 저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피카소가 생전에 교류하고 우정을 나누었던 수많은 지인들 가운데 엘뤼아르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인 대부분은 피카소에게 경외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 존경심은 피카소가 그들을 존경했던 마음보다 훨씬 더 컸다. 하지만 피카소와 엘뤼아르의 관계는 좀 달랐다. 두 사람은 1920년대 이후에 만났다. 엘뤼아르는 이미 이 거장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고, 피카소는 초현실주의를 지향하는 시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실질적인 만남은 1934년에 이루어졌고, 이 화가는 마치 지금까지 누군가와 한 번도 인간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엘뤼아르와의 관계에 열중했다. 그 당시의 피카소는 전투적이고 정복적인 성향을 추구하는 방종한 예술가였다. 반면에 엘뤼아르는 매서운 정치적 관념을 갖고 있는 이상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그래서 피카소는 엘뤼아르와의 교류를 통해 타자성의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 화가는 그 타자성을 통해 예술적인 차원뿐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인 차원에서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 당시에 피카소가 지니고 있던 화가로서의 재능은 전 세계적인 찬사를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다. 이를테면 피카소의 유명한 작품인 <도라 마르의 초상>과 <누쉬 엘뤼아르의 초상>에는 시적인 정서가 아주 뚜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미술계의 거인이었던 피카소는 <고통의 수도>와 같이 숭고한 작품을 창작한 시인 앞에서 돌연, 자신의 존재가 자그맣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엘뤼아르의 곁에 있을 때 더 이상 위풍당당한 거물이 아니었고, 시인이 되려는 꿈을 이루지 못한 아마추어 시인일 뿐이었다. 그는 엘뤼아르가 몇 마디의 단어들을 이용해 환하게 빛나는 이미지들과 놀라운 광경을 창조하는 방식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인도 피카소의 창작 방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보이게 만드는 비전'을 형상화하고 있었지만, 시라는 장르는 피카소에게 있어 가장 예술적인 장르로 보였다. 황홀한 매혹에 사로잡힌 피카소는 엘뤼아르에게서 어떤 경쟁심도 느끼지 않았으며 오직 존경심과 감탄의 감정만 간직하며 지냈다. 그런데 엘뤼아르도 이 화가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 시인도 역시, 피카소와의 교류 덕분에 세상을 보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엘뤼아르는 1939년에 출판한 모음집 『보이게 만드는 비전』서문에서, 여섯 부분으로 구성된 송 사위에 '파블로 피카소에게 헌정함'이라는 문구를 넣음으로써 자신의 존경심을 드러냈다. 모든 것들은 바로 당신의 눈에서 다시 탄생하네. 현재의 추억들을 바탕으로 질서도 무질서도 없이, 그저 단순히 무언가를 보게 해준다는 것의 매력은 이렇게 솟구치네. 엘뤼아르는 "20세기에 살았다는 것이 행복했다"라고 단언했는데, 그 이유는 "피카소를 그 시대에 만날 수 있었다"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카소가 미술에 대해서 품고 있는 애정은 그가 여자들을 향해 품고 있는 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화가는 이런 말을 자주 반복했다. "그림의 실체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그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들과 모델들, 유부녀들과 애인들, 창녀들과 여자 조언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평소 매정하고 불성실한 호색한이었던 피카소는 병적인 소유욕으로 인해 질투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피카소에게는 여자라는 존재가 필요했지만, 여자들은 그에게 있어 그저 창작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을 뿐이었다. 피카소의 여자들은 그에게서 도구화되었고 자주 그에게 '소비되었다.'그는 그 여자들이 그의 부속품인 것처럼 행동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카소는 엘뤼아르를 통해 그의 아내인 누쉬 엘뤼아르를 만나면서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뮤즈였던 그녀는 피카소의 모델이 되었는데, 그는 그녀를 만나게 되면서, 여성에 대한 강한 소유욕만을 지닌 냉혈한의 시선을 거두고 새로운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의 여자가 아닌 타인의 여자를 그리는 법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피카소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여자였다. 피카소는 자기 소유의 여자가 아닌 여자도 자신을 위해 이젤 앞에서 포즈를 취해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즉 상대를 탐욕스럽게 정복하지 않더라도 그 상대를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엘뤼아르는 롤랜드 펜로즈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얘기를 적었다. "피카소는 마치 신의 축복을 받거나 악마에 홀리기라도 한 듯, 누쉬의 초상화들을 점점 더 황홀하고 경이롭게 그리고 있어.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 실행하는 보기 드문 예술가지. 그리고 그런 결단력 있는 창작 활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야." 한편 피카소는 1934년까지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살고 있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끌렸던 피카소는 그들이 이행하는 정치적인 참여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교조주의에 대해 항상 생경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가 보기에 그런 교조주의는 개인적인 기호나 취미가 결여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뤼아르가 그에게, 독재적인 전체주의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패인 공산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하자 변화가 찾아왔다. 이 시인이 피카소에게, 평화를 위한 전투는 정치적인 색뿐 아니라 미학적인 색도 띨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이 벌어졌다. 1936년 11월에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란군이 마드리드를 함락하려는 목적으로 폭격을 시작했고 식량 공급마저 끊기 위해 그곳을 봉쇄했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용감하게 저항했고 도시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은 몸을 던져 전투에 참여했다. 이를 지켜본 엘뤼아르는 「1936년 11월」이라는 제목이 붙은 시를 《인류》잡지에 발표했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그 사건은 자기 친구가 창작한 시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커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화가는 자신도 그와 같이, 투쟁을 위해 자신만의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스페인 내란이 이어지던 중, 1937년 4월 27일에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비행기들이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했고 이곳은 순식간에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피카소는 엘뤼아르의 부탁에 따라 그 사건을 작품의 주제로 삼고, 파리 국제 박람회에 출품할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엘뤼아르도 이 거대한 규모의 그림 옆에 곁들일 시를 창작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의 참상과 마주했을 때, 시보다 그림이 훨씬 더 효과적인 울림을 줄 거라고 확신했다. 사람들의 자각과 이해를 단숨에 촉발시키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충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된 <게르니카>는 하나의 우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본질적인 기원은 타인에게서 그 시작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피카소는 1937년, 그의 연인이었던 도마 마르의 초상화인 <우는 여인>을 그렸는데, 이 작품은 마치 <게르니카>에 덧붙인 추신처럼 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도라의 눈물은 전쟁과 폭격의 충격이 남긴 참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피카소는 주로 여인들의 육체와 얼굴을 그림에 담았지만, 엘뤼아르를 만난 후 사회적인 투쟁에 동참하게 되면서 여인의 초상화 속에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그가 엘뤼아르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후에 벌어진 이런 식의 정치적인 방향 전환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신문은 1944년 10월 5일에 이런 제목의 글을 게재했는데, 이 글의 발표는 엘뤼아르가 준비한 것이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 피카소가 공산당에 입당하다." 엘뤼아르는 1952년에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 당시 피카소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 일에 대해 클로드 로이는 이렇게 회고했다. "장례식 다음날, 방 한쪽에서 나와 친구들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가 종이 몇 장을 꺼내더니 스케치를 시작했지요. 아마도 그는 엘뤼아르의 초상화 시리즈에 덧붙이게 될 어떤 주제를 떠올리며 작업을 시작한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그저 말없이 그를 지켜보았습니다. 연필과 목탄이 도화지에 닿을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때 놀랍게도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던 거예요. '문을 닫아주세요. 좀 춥군요.' 하지만 제 기억에 그는 전혀 추위를 타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사실 피카소는 사랑에 있어서 든 우정에 있어서 든 아주 차가운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엘뤼아르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얼굴은 자기 친구를 영원히 잃은 슬픔에 잠겨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얼굴이었다. 엘뤼아르와의 만남이 피카소로 하여금 불러일으킨 변화는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던 그런 인간적인 유약함까지 드러나도록 베일을 벗긴 것이다. 얇은 티셔츠 바람으로도 추운 겨울날을 보내는 데 익숙했던, 활활 타오르는 불의 기운을 가졌던 이 남자는 자신도 서늘한 추위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갖 아이디어와 욕망이 항상 머릿속에 넘쳐흘렀던 이 창조자는 친구의 죽음이 자신에게 남겨놓은 공허의 빈자리를 조용히 응시했다. 만남의 진정한 저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변화를 가져오는 하나의 강력한 힘이다. 마리아 카자레스를 만남 알베르 카뮈는 자기 내면에서 애정과 증오의 관계가 뒤집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폴 엘뤼아르를 만난 파블로 피카소는 기꺼이 본래의 인간적인 파블로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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