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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내가 당신의 타자성을 경험하게 될 때

by 딘성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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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고, 우리가 세상과 맺고 있는 관계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당신과 만난 이후 더 이상 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또한 나는 하나의 유일한 위치에서 세계를 인식하는 모나드('단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철학 용어로서,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정신적인 실체를 뜻한다. -역주)도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만나게 된 나는 이제부터 당신의 시선을 통해 함께 세상의 만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어떤 뉴스가 중요한 시사 문제로 떠올라 큰 화제가 되었을 때 나는 당신이 그 뉴스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강연회에 참석할 때면 당신이 강연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상상하게 된다. 어떤 노래를 들을 때면 당신이 그 노래를 마음에 들어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영화관에 갈 때면 나는 당신의 눈으로도 그 영화를 본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당신은 내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당신은 역시, 내가 예상했던 그 장면에서 감동을 받았다. 내가 당신을 만났다는 사실, 또 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관점을 내가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내가 내 취향과 내 시선, 내 전망을 유지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당신의 취향과 시선, 전망으로 위해 더 풍성해진다.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두 번 본 셈이 되는 것이다. 두 번을 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눈과 내 눈으로 동시에 그 영화를 보았다는 뜻이다. 당신을 만난 이후로 나는 이렇게 온 세계를 두 번씩 인식하게 된다. 자신이 자기 세계에서 더 이상 '중심'에 있지 못한다는 사실은 당황스럽기도 하고 흥분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사물을 보는 나의 습관적인 방식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기에 당황스럽고, 내가 결국 세상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이기에 흥분된다. 나는 내 시선과 다른 관점을 지닌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르트르는 타자성이 물고 오는 이 괴로운 경험을 규정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타인이 나의 세계를 훔친다." 이 경험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관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자신의 시각이 계속 바뀌는 상황이 반드시 뒤따른다. 타자성에 대한 이런 발견은 하나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그 결과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는 타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나와 타인과의 차이를 경험하게 해주고 그 차이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만남'이다. 단순히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내 차 앞으로 누군가의 차가 갑자기 끼어들 때에도 나는 타인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만난 것이 아니다. 직업적인 일 때문에 내가 누군가와 협력해야 할 때에도 나는 타인의 존재를 인식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를 반드시 만났다고는 할 수 없다. 누군가가 내게, 언제라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는 섹스 파트너 역할을 해준다면 나는 그 사람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과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우리가 매번 만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 미나 이완 반대로, 그 타인이 내 연인이 되고 내 친구가 되고 내 파트너가 될 때가 있다. 즉 내가 누군가의 시선과 마음을 통해 어떤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로 그럴 때 나는 내가 그 사람과 진정으로 만났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그런 느낌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나와 그 사람과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그 사람이 지닌 타자성을 인식하게 된다. 사실 타인을 만나면서 겪는 경험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나와 그 사람과의 차이점이 오히려 어떤 격차를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그와 대면하고 그를 이해하고 그와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타인과의 만남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닌지,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경험은 그런 우려들에 대해, 그것들이 오히려 반대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우리의 친구들과 연인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가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눈여겨보며, 타인의 시작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일에 성공할 때마다, 우리는 앞에서 말했던 이론적인 불가능성을 뒤집을 수 있다. 삶이란 이론보다 더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나의 눈에도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당신을 만났다는 확실한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고를 통해 분석을 시도해 보자. 이제부터 할 이야기에는 연인들의 만남에 적용하는 관점이 들어있다. 바디우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랑은 하나의 건축물이다. 사랑은 한 사람의 관점이 아닌 두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쌓아 올리는 하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모든 건축물들이 그러하듯 이 건축물을 완성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타인이라는 존재를 발견하는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고,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다른 시각으로 사물들을 바라보는지 이해하는 일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알랭 바디우는 이에 대해 근사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탐험을 한 번도 마친 적이 없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가, 타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시도할 수 있는가,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려면 사랑과 우정에 대한 지속적인 어떤 감정들이 필요하다. 그런 정서적인 감정들이 없다면 자신의 관점을 전환하는 지적인 경험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즉 사랑과 우정이 없다면 우리는 타자성의 경험에 도달할 수 없다. 플라톤이 언급했던 이 수수께끼 같은 문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철학을 할 수 없다." 만약 '자아에 대항하여'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자기 의견 속에 틀어박히는 습관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 철학을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내가 철학 속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은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법을 알려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위치가 아닌 두 사람의 차이를 상징하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랑의 그런 신호는 기만적인 허상이 아니다. 내가 나만의 유일한 정체성을 지닌 채 '한 사람의 관점'으로 예전과 비슷하게 사물을 바라보지 않고, '두 사람의 관점'으로 우리의 아름다운 차이점들로부터 비롯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그것이 바론 내가 당신을 만났다는 증거가 되고, 하나의 온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우리가 극장을 나오며 우리가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우리가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해 나와 상대방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 헤아려보게 될 때마다 계속 이어진다. 더욱이 타인의 관점을 향해 자기 마음을 여는 것은 불필요한 많은 오해들을 사라지게 하고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넘기게 해준다. 자기 아내가 어떤 남자의 점심 식사 초대를 받아들여서 기분이 상한 남편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자. 남편은 생각한다. 그 남자는 아내의 경쟁 업체에서 그녀와 같은 부서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화 자리가 아내의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전에 그 남자는 아내에게 약간 노골적인 수작을 걸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남편은 그녀가 마음의 문단속을 분명히 해주기를 바란다. 남편의 상상하기로는, 그 남자가 아내와 점심을 먹게 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내에게 매력을 어필할 것만 같다. 간단히 말해서 그가 엉큼한 속셈을 품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남편은 이미 자기가 배신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 남편이 그런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아내의 관점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내도 그 남자가 전에 자기에게 작업을 걸려고 했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의 안 좋은 일은 그냥 흘려버리고 직업적으로 흥미로운 대화의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한다. 즉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작업을 걸거나 환심을 사려고 하는 모든 남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스스로 금한다면 그녀의 인간관계는 엄청나게 좁아질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이 만남에 대해서 남편이 걱정하는 그런 점심 초대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남편은 아내의 이런 사고방식을 수용하고 나서야, 자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과거의 그는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 자기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기의 관점을 전환함으로써 그 묘한 배신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플라톤은 고대 비극 경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운 장르인 철학적 대화법을 고안했다. 그는 그 대화법을 통해 '만남'을 찬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의 대립은 거기에서 하나의 사유를 만들어낸다. 또한 관점의 대립은 거기에서 하나의 사유를 만들어낸다. 또한 관점의 대립은 각각의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게 해주고, 타인의 위치를 부정하지 않고도 그 사람의 위치에 대해 마음을 열게 해준다. 그리고 타인의 위치를 더 깊이 있게 알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사실 플라톤이 쓴 가장 아름다운 대화는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아주 쉽게 상대를 압도했던 대화를 정리한 책들이 있는 게 아니라 『소피스트』나 『향연』에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모두 동등하게, 흥미를 끌만한 서로 다른 관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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