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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나는 어딘가에서 당신을 본 것 같아요"

by 딘성 202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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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낯선 여자에게 종종 이런 밀을 건넨다. "당신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아요."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이 이런 접근 방식은 너무나 진부하다. 그러나 이 방식은 모든 종류의 만남에 내재된 어떤 진실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내가 타인을 만났을 때 상대를 알아보는 그 느낌이다. 나는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이 진부한 말이 플라톤의 『메논』에 나오는 명제들 중 하나를 연상시킨다고 확신한다. 플라톤은 메논과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설정하여, 상대방을 알아본다는 것(재인식한다는 것)의 수수께끼를 파헤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이데아 이론(플라톤 철학의 중심 개념으로서 모든 존재와 인식의 근거가 되는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실재를 뜻하는 말이다. 근대에는 '관념'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역주)을 적용하여 만남이란 것의 실체를 분석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생각을 분명하게 정립하는 순간에 생기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이 감정은 명료한 것인지, 그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것은 아닌지, 어째서 하나의 이데아(관념)는 '재발견'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 이에 대해서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인식'이라는 것은 '다시 알아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사용했던 용어로 다시 풀이하자면, '인식'이란 '상기하는 것(플라톤의 유명한 이론인 상기설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가 진과 선, 미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원래 살았던 이데아의 세계를 상기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즉 이 철학자는 육체와 영혼이 결합하면 인간은 의식에 의해서 그것을 기억한다고 믿었다. -역주)'이다. 플라톤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에, 그리고 지상에서 보내는 한정된 기간 동안 우리의 육체 속에 '들어가 있기' 전에, 이미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에 속해있다. 우리는 죽으면서 그 세계를 다시 발견하게 되고 그때 비로소 우리의 육체가 지닌 한계로부터 풀려난다. 이렇듯 하나의 이데아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육체의 굴레 속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자기가 이해할 수 있는 영원성의 형태로 이데아를 알아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이데아, 즉 하나의 관념과 마주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되찾는 것이다. 알베르 코앵의 소설 『영주의 애인』의 초반 부분에서, 솔랄이 아리안을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 역시 상대방을 알아보는 듯한 '재회'의 분위기를 풍긴다. 코앵의 눈부신 문체들은 솔랄이 그녀를 보면서 가졌던 그 분명한 느낌의 마력을 너무나 매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 강렬한 힘은 소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우리 인간들에게 큰 혼란을 주지만, 동시에 관능적인 매력을 선사한다. "운명의 밤이었던, 리치 호텔에서의 그날 밤에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났어요. 그녀는 경박해 보이는 사람들 틈에서 유일하게 고귀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두려움까지 들게 하는 섬뜩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지요. 출세와 성공을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치 나와 그녀만 서있는 것 같았고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어요. 그녀는 바로 그런 존재였어요. 그녀는 내가 기다렸던 사람이기도 했고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사람이기도 했지요. 운명적인 그날 밤에 선택되었으며, 길게 말려 올라간 그녀의 속눈썹이 깜빡하고 한 번 치켜 올라갔던 순간에 선택된 사람이 바로 그녀에요. 세상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아니면 그 사랑이 식는 데에는 몇 주나 몇 달의 시간이 걸리죠. 그래서 그들에게는 여러번의 만남과 공동의 취미 생활도 필요할 뿐 아니라, 서로를 우상화하는 결정화 작용까지 필요한 거예요.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말이에요. 그녀의 긴 속눈썹이 한 번 치켜 올라갔던 그 짧은 시간에 모든 것이 정해졌어요." 사실 솔랄에게 있어서 아리안은 완전히 낯선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순간도, 그가 일생일대의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속눈썹이 한 번 치켜 올라갔던 순간"이라는 짧은 시간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어떤 논리나 이성적인 사고도 필요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단 한 마디의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솔랄이 그녀에게서, 그런 거추장스러운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 무엇인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발견은 "기대하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기대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의 앞에 갑작스럽게 등장했으니 전자도 맞는 말이고, 그가 갈망해 왔던 욕망의 대상을 알아본 것이니 후자도 맞는 말이다. 그가 살아온 과거의 삶 전부가 그를 그 욕망으로 이끌었으므로, 그는 욕망의 대상인 그녀와 이미 '약속'이 되어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그가 리츠 호텔에 있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그 '운명의 밤에 이루어진 만남'은 그가 능동적으로 발견한 일이었다. 솔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하지만 이게 진심이에요. 속눈썹이 한 번 움직였던 순간, 오직 그것뿐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그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시선만 힐긋 보냈어요. 그런데 그 순간이 내게 불멸의 영광을 안겨주었어요. 그 순간은 따스한 봄날 같았고 찬란한 태양 같았으며, 포근한 바닷물 같기도 했고, 해안가에서 바라보는 투명한 바다 같기도 했답니다. 나의 젊음이 되살아났고 온 세상이 다시 깨어난 듯했어요. 나는 알아차렸어요. 제가 그녀 이전에 만났던 어떤 사람도, 즉 아드리엔도, 오드도, 이졸데도, 그리고 제가 빛나는 영광과 젊음을 누렸던 시기에 만났던 다른 여자들도 단지 이 매혹적인 여인의 등장을 예고해 준 존재들이거나 그녀의 뒤를 시녀처럼 따르게 될 뿐인 존재들이라는 것을요. 그래요, 그녀 이전에도 그녀 이후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어요." 사실 솔랄에게 찾아온 이 분명한 확신의 힘 속에는 '광기 어린' 무엇인가가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늘 의심하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만남들은 우리를 그 의심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만남은 때때로 '눈꺼풀이 살짝 움직이는 순간'이라는 찰나의 시간만으로도 이루어진다. 이렇게 우리는 미지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활활 타오르는 감정의 불길에 사로잡히는 순간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한창 위험을 무릅쓰고 있을 때, 어떤 친숙한 감정이 나타나 우리를 안심시켜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게 될 때 나타나는 신호이다. 이제 2013년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가장 따뜻한 색, 블루>(국내에서 개봉되었을 때의 제목이고, 영화의 원제는 '아델의 삶'이다. -역주)에 대해 이야기해 볼 시간이다. 압델라티프 케시시 감독은 두 인물이 서로를 발견하고 알아본 그 순간을 바로 이렇게 필름에 담았다. 아델은 무심히 길을 걸어가다가 엠마를 발견한다. 아델의 눈에 들어온 엠마는 아주 짧은 커트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짧은 머리 여자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있었다. 아델이 그 커플과 마주친 후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엠마도 똑같이 뒤를 돌아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난다. 엠마는 친구에게 팔을 두른 채 원래 가던 길을 간다. 그러나 아델은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멈춰 선 채, 현기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녀는 갑자기 달려오는 스쿠터에 치일 뻔하고 자동차 운전자가 그녀에게 어서 비키라며 경적을 울려댄다. 아델은 항상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생각해 왔고 최근에도 같은 학급의 남학생과 침대 위의 사랑을 나눈 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를 덮쳐서 깜짝 놀라게 만들었으며 엄청난 파도에 휩쓸리게 만든 이 순간의 진실은.... 너무나 확실해 보였다. 즉 처음 보는 그 여자가 아델의 마음에 든다는 사실이다. 아델이 평소에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이 욕망, 엠마를 만나기 전에는 등을 돌리고 살았던 이 욕망이 아델을 낚아챈 후 그녀를 다른 세계로 실어갔다. 아델은 스스로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던 욕망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이 욕망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델은 지금 막 엠마를 만났다. 아델은 이중적인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평온하게 이어져 왔던 그녀의 삶이 곧 전복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며칠 후에 아델은 같은 학급의 여자 친구에게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는 등 충동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친구와 함께 찾아간 동성애자 전용 클럽에서 엠마를 다시 마주친다. 먼저 아델을 알아본 엠마가 그녀에게 와서 여기서 뭐 하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아델은 "저도 모르겠어요. 친구를 따라왔을 뿐이에요. 우연히 들어온 거예요." 엠마는 아델에게 미소를 보이며, 이런 곳은 '빠져들면 안 되는' 장소라고 말한다. 아델보다 몇 살 더 많은 엠마는 아주 당찬 태도를 보였고 일종의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그녀의 전부는 아니었다. 엠마가 아델을 향해 웃으며 바로 "아니, 우연이란 건 없어."라며 핵심을 짚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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