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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고요한 변화

by 딘성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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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변화들이 앞의 사례들처럼 뚜렷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즉 만남을 통해 생겨난 모든 변화들이 갑작스러운 전복이나 새로운 발견, 방향의 전환, 변모의 양상들을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변화들은 프랑수와 줄리앙이 "고요한 변화"라는 불렀던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방식으로 생겨난다. 또한 계속해서 밑으로 숨는 속성으로 인해, 적어도 초기에는 종종 그 변화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다 정말 갑작스럽게, 자기가 걸어온 길에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카뮈의 『이방인』은 나를 단번에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나는 이전의 생각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서, 그 책의 독서가 내 고요한 변화의 과정에 있어 시초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변화는 그 후로 이어진 수많은 만남과 수많은 경험들에 의해 자양분을 얻게 되었다. 나는 고작 열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방인』을 처음 읽었고 이 작품을 여러 번 다시 읽었다. 그리고 카뮈의 산문집 『결혼』, 『여름』도 함께 읽게 되었는데, 그때도 역시 카뮈의 아름다운 문장들에 감탄했으며 책장을 넘길 때마다 빛나는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을 상상하며 황홀해 하곤 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길지 않은 글 속에서, 내 어머니의 혈통이 닿아있는 나라에 있는 것만 같은 향수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전까지,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카뮈의 이 산문들을 읽은 이후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태양과 여름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또한 삶의 시련을 대하는 자세도 예전과 달라졌다. 즉 카뮈의 이 걸작들과 만난 이후로 내 피부와 이마에 닿는 햇빛마저도 새롭게 느껴졌다. 특히 『결혼』의 몇 구절을 읽은 후로 더욱 그러했다. "어떤 시간에는 이 시골 마을이 태양의 눈부신 빛으로 검게 변해 버린다. 나의 두 눈은 속눈썹 가장자리에 떨리며 남아있는 빛과 색깔 한 줄기가 아닌 다른 것을 보려고 헛되이 깜빡일 뿐이었다." 좀 더 읽다 보면 이런 구절과도 마주친다. "나는 이제 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대지가 선물한 농축액으로 내 몸을 잔뜩 적신 후에 바다에서 그것들을 씻어야 한다. 해안가에 도착하면 나는 모래 위에 푹 쓰러져 버린다. 세상으로부터 내던져져 내 살과 뼈가 지닌 묵직함 속으로 되돌아간 다음,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태양의 눈부신 빛으로 정신이 멍해진 채 다시 내 팔 쪽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거기에는 마른 피부의 반점들 위로 물결이 미끄러진 흔적이 있고 금빛 솜털과 소금기 있는 모래 알갱이가 들러붙어 있다." 왜 이 부분에서 카뮈의 문장들이 그토록 강하게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 뚜렷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도 그 문장들이 내 어머니의 모국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토록 가깝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내 몸과 내 감각 등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던 도시 출신의 아이였기 때문에, 즉 너무나 '이성적인' 아이였기 때문에 그 장면이 그렇게 매혹적으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나는 태양을 바라볼 때 기상학적인 지식이 아닌 다른 것을 보기 위해 계속해서 카뮈의 글을 읽어야만 했다. 카뮈를 만나기 전에 태양은 내게 있어서, 그저 커다란 모자나 선크림으로 그 강렬한 빛을 가리고 차단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카뮈가 묘사했던 태양을 만난 이후로 나는 태양 속에서, 어려운 시절을 함께 버틸 수 있는 동맹 관계의 가능성을 찾아냈다.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환한 빛 속에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나는 카뮈를 통해서 내가 나중에 골몰하게 될 문제의식들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은 내 삶에 있어 거의 하나의 윤리로 자리 잡게 될 것들이었다. 그 윤리란 나쁜 상황 속에 내몰렸을 때 상처받고 낙담하게 될지라도 태양의 환한 빛 속에 머물려고 노력할 것, 삶이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역시 삶을 사랑할 것, 이었다. 헤겔의 철학은 왜 타인과의 만남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져다주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정신현상학』 4장에 주인과 노예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나온다. -역주)'에서 그 무엇보다도 창의적인 접근법을 이용해 주인을 노예와 대비시켰다. 『정신현상학』의 저자인 이 철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명령을 하는 주인은 닫힌 원 안에 갇혀있는 것이고 자신의 권한과 주체성으로 인해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다. 또 다른 주인이라든가 자신의 분신을 만나지 않고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이 지니는 가치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타자성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누군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노예의 경우에는, 비록 그가 주인에게 복종하고 있는 처지라고 해도 자연과 마주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노예는 자신의 일 때문에 자연과 대면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 속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알아보게 하는 동시에 자신에 대해 인식하게 만들어준다. 또한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분산들로 인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식별된다. 헤겔의 따르면 자유는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유는 타인의 동의에 따르는 행동들로 인해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예는 "주인보다 더 자유롭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비유적인 우화일 뿐이지만, 기이한 동물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서 '만남'의 결정적인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환히 밝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아닌 타인을 만나야 한다. 바로 그것이 헤겔 철학의 변증법이 지니는 전부이다. 즉 하나의 생각이 그 자체의 힘을 온전히 펼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생각과 마주쳐야 한다. 하나의 명제는 그것과 상반되는 반대명제라든가 그것을 부정하는 명제가 없이는 진정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지닌 차이점에 대항하여 타인의 또 다른 인식과 대면해야 한다. 헤겔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욕망인 '인식'을 충족시키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 타자성을 대면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우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헤겔은 신 역시도 스스로, 우리 인간과 같은 필요성을 감지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이 거대하고 형이상학적인 담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역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즉 인간이 존재한 그 최초의 시간에 신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희미한 관념만을 갖고 있었다. 헤겔은 이런 말로 보충했다. 그게 어떤 종류의 신이든지 상관없이 모든 신적인 존재는 '불안의 정신'을 통해 존재한다. 즉 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타자'를 창조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과 가장 대비되는 존재인 '대자연'이다. 신은 자연을 자신의 맞은편에 놓기 위해, 그리고 자연과 만나기 위해 자연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성령과 가장 대비되는 것은 바로 물질이다. 헤겔이 생각하기에, 이 세계는 신의 그런 기원적인 행동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자성의 필요'에 비추어 신의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은 대자연과 대면하게 되면서 물질과 마주쳤기 때문에 자신과 물질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었으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신은 그런 자연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점차 깨달았을 것이고 자연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했을 것이며, 자연에 성령을 불어넣기 시작했을 것이다. 성령이 스스로 이런 모색을 했던 것은 인류 역사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인간의 역사에 하나의 발전이 있었다는 특징도 알아볼 수 있다. 인간의 역사가 한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넘어갈 때마다 성령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의식 속에서도 발전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신은 자신에 대해 더 발전된 의식 세계라고 할 수 있는 '자유'에 도달하여 '자유' 그 자체가 되었고, 이 세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 헤겔이 주장했던 이 장엄한 이야기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줄지도 모른다. 확실히 현시대에는 역사의 발전에 대한 인식이 19세기 사람들이 지녔던 그 인식보다 덜 명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겔의 이야기는 만남 그 자체의 역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에 우리의 큰 관심을 끈다. 이 역학의 핵심은 그것이 모든 실현과 모든 발전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는 점이다. 이 세계를 창조한 신마저도 다른 존재를 만나야 할 필요성을 안고 있었다. 신은 인간들의 창조에 있어서도 다른 방법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다가가지 않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타인을 만나지 않고는 자신과 마주할 수 없다. 시인 피에르 르베르디도 헤겔의 관점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증거들만 존재할 뿐이다." 즉 사랑은 그 행동들로 증명된다는 뜻이다. 마치 아름다운 만남은 그 만남의 결과로 생긴 변화들로 인해 평가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말한 '만남'의 의미에서 비추어볼 때, 우리는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될 만남이나 독이 될 수도 있는 만남에 대해 건전한 경각심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 좋은 만남은 나를 성장시키고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며 나란 존재를 세상 밖으로 활짝 펼쳐지게 만드는 반면, 나쁜 만남은 나의 가치를 떨어지게 하고 나를 종속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며 나를 고립시키기까지 한다. 만약 내가 변화를 했다고 하더라도 과거보다 부정적으로 변했다면 그것은 타인이 내 안에 있는 삶의 저력을 깨어나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독이 되는 사람은 나의 나약함을 이용하려고 하고, 자기의 보잘것없는 알량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 내가 지닌 가치를 떨어뜨리는 사람이므로, 결국 나를 부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즐겨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고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움의 종류도 너무나 많다. 그것들 모두는 자기가 깨어날 시간을 기다리며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나를 거부하는 것들과 대적할 수 있는 힘을 키워줄 좋은 만남의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만남은 우리의 의존성이나 적대감이 작동하는 기제를 우리 스스로 알아보게 해주는 치료사가 되기도 하고, 우리를 지지해 주고 신뢰를 보내주는 친구가 되기도 하며, 우리가 직업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줄 파트너가 되기도 하다가, 우리 자신이 사랑받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연인이 되기도 한다. 만남의 종류가 사랑에 관한 것이든, 우정에 관한 것이든, 직업에 관한 것이든 상관없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그 만남이 우리 내면에 남긴 결과를 우리 스스로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만남이다. 카뮈는 『작가 수첩』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들은 대개, 우리가 사랑하기 시작한 그 사람들이 예전의 당신 모습에 대해 알기를 원한다. 그것을 알게 되면 서로의 만남 이후 그들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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