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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징후들:에밀리 뒤 샤틀레와 볼테르의 만남

by 딘성 202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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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세기인 18세기에 만났던 볼테르와 에밀리 뒤 샤틀레는 사랑의 만남에 관한 아름다운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이 타자성의 경험을 오랫동안 지속했기 때문이다. 샤틀레 부인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부유한 자산가였다. 또한 그녀는 과학자이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프랑스어로 처음 번역한 업적으로 유명하다. 철학자이자 극작가였던 볼테르는 샤틀레 부인을 만난 후 그녀를 통해 물리학의 수학 분야를 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는 수학자인 모페르튀이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말까지 썼다. "나는 에밀리의 관점으로 뉴턴의 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내 입장에서는 뉴턴의 책을 직접 읽는 것보다 그 방법이 더 쉽게 느껴지거든요." 이렇듯 두 연인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공유했다. 그들의 이런 방식은 진지한 문제에 있어서 만큼이나 자질구레한 문제에서도 유용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들이 샤틀레 후작 소유의 시레이 성에 머물렀던 14년 동안 가장 사랑했던 것은 바로 자신들의 차이가 심화되는 순간들이었다. 에밀리의 남편인 샤틀레 후작은 볼테르처럼 빛나는 지성을 지닌 학자를 자기의 성에 묵게 한다는 사실에 우쭐해하면서,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결혼생활 동안 이어진 배우자의 외도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덕택에 볼테르와 에밀리가 함께한 14년의 세월은 다음과 같이 지속되었다. 낮에는 학문적인 연구에 매진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였고, 밤에는 사교계 만찬을 열어 모페르튀이나 리슐리외 같은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다. 또한 두 사람이 함께 수정해서 완성한 볼테르의 연극을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했다.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새롭게 발견한 14년 동안의 교류는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사실 교제 초기에 볼테르는 에밀리가 연구를 하는 동안에 보이는 맹목적인 열정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주로 과학 분야의 주제들에 품고 있던 열정으로 인해, 그녀는 수많은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고 건강이 악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덕분에 그녀는 볼로뉴 과학 아카데미 명예회원으로 뽑힌 유일한 여성이 될 수 있었다. 그녀가 살았던 18세기에는, 여자들이 나라를 다스릴 권력도, 나라를 지킬 권리도 갖고 있지 않았고, 심지어 문학 살롱들도 문학에 대해 무례한 야유를 보내는 사교계 남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과학 연구 쪽으로 야망을 품고 있던, 거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행복론』에서 그 주제로 글을 썼다. "연구에 대한 애정은 남자들의 행복보다 여자들의 행복을 위해 더 필요하다. 남자들은 행복해지기 위한 무한한 방편들을 갖고 있지만 여자들에게는 그것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자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도달하기 위한 많은 수단들이 존재한다. 조국의 발전을 위해 자기의 재능을 유용하게 쓰려고 하거나 또는 다른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데 재능을 쓰려고 하는 남자들의 야망은 확실히, 여자들이 학문 연구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야망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강하다. 즉 남성들은 용병술에서 솜씨를 발휘하거나 정치를 하는 재능, 협상을 하는 능력 등을 통해 여자보다 더 큰 기대와 야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낮은 사회적 위상으로 인해 명예로운 직위에 올라가는 일에서 배제된다. 어쩌다 매우 고결한 정신세계를  갖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해도 그녀에게 돌아오는 학문 연구의 범위는 제한되어 있다. 그것은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남은 것들일 뿐인데, 모든 연구에서의 소외와 부차적인 직위 등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럴 때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라는 형을 선고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볼테르는 에밀리 뒤 샤틀레와의 교류를 통해 지식과 야망, 그리고 동시대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파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또 다른 관점도 알게 되었는데, 프랑스 역사상 처음으로 제기된 '여성'과 '페미니즘'에 관한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타자성에 대한 이 경험은 사회적인 관습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다. '여신 에밀리'는 화를 낼 때면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했고 매우 다혈질적이었다. 또 그녀는 성격적인 면에서 한 남자가 만족시키기 힘든 다양한 욕구들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볼테르는 평범한 시민 계급 출신의 남자였다. 즉 여성이 자기의 가정과 아이들, 남편을 위해 완전히 헌신해야 하는 평민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완전히 다른 성장 배경을 지녔다. 다른 귀족 출신의 여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밀리도 그 빛의 세기에 불어왔던 자유의 바람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싶어 했고, 세상의 모든 지식들과 모든 욕망들을 소유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볼테르를 사랑하긴 했으나 보석과 도박을 좋아했고, 그만큼이나 뉴턴과 로크의 학설에 깊이 빠져있는 자유롭고 강인한 여성이었다. 사실 『캉디드』의 저자인 볼테르에게 있어서 그런 타자성의 경험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볼테르는 마침내 그녀가 지닌 관점을 취하게 되었고 에밀리의 자유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심지어 그 자유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상대가 지닌 나와의 차이점에 대한 이런 경험은 사유의 영역에서도 분명히 작용하게 마련이다. 에밀리는 라이프 니츠의 이론에 비추어볼 때 낙관주의자였다. 그 낙관주의 이론은 '세상의 최적의 상태(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장했던 이론이다. 그의 예정조화설에 따르면 세계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모나드'는 그들 전체가 가장 최상의 질서를 이루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 세계는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어서 최선의 질서를 얻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지닌 낙관주의적 사고를 파악할 수 있는 주장이다. -역주)'를 창조한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수학이라는 학문에서 찾는다. 전체성의 관점에서 사물들을 파악하는 이 방식, '세상의 최적의 상태'라는 이론을 투영해서 부정적인 부분까지도 상대화해 버리는 이런 방식은, 볼테르적인 관점과 완전히 상극을 이루었다.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고 교리보다 반어법적인 수사법을 더 선호했으며, 거창한 학설보다 짧은 분량의 원고 읽기를 더 좋아했던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적인 낙관주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연인의 학문적인 관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기의 입장을 고수해 나갔다. 볼테르는 그녀의 지지를 받기도 하고 그녀와 서로 상반된 관점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캉디드』를 두 사람의 이런 차이점에 비추어보면, 그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볼테르는 그 잔인한 내용의 이야기를 통해,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겨냥하면서 자기의 연인이 가진 낙관론의 관점에도 분명히 손을 뻗고 있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장면들(피로 물든 전투 장면, 지진, 강간 등등)이 줄지어 늘어선 가운데 라이프니츠의 이 유명한 말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최적의 상태 속에서 최고의 질서를 위한 것이다." 볼테르는 서양 철학 사조 특유의 낙관주의적인 경향을 조소하기 위해 이런 과장법을 사용했다. 이를 봤을 때 그가 에밀리 뒤 샤틀레의 세계관을 추종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가 그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추측할 수 있었고, 시레이 성에서 벌어졌을 그들의 열띤 토론에 대해서도 상상할 수 있다. 에밀리의 어떤 주장들은 그에게 일단 어느 정도 수용된 후 최종적인 반대 선언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볼테르에게 있어서 그녀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자기와 다른 시각에 대한 관심이 없었더라면, 그는 아마도 라이프니츠적인 낙관론에 대해 최소한의 신뢰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캉디드』도 결코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우리는 굳이 타인의 관점을 자기 관점으로 만들지 않고도 타인의 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에밀리 뒤 샤틀레 역시,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14년의 세월 동안 그의 입장에 서서 그의 인생과 그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두 번이나 비참한 감옥살이를 했던 일, 로앙 샤보의 시종으로부터 천한 하층민 취급을 당하며 몽둥이로 맞은 사건, 파리에서 도망쳐야 했던 일, 영국으로 추방당했던 경험,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성격, 자기의 안전과 두 사람의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생각의 자유를 항상 고집스럽게 유지했던 면모 등이 그것이다. 사실 볼테르가 썼던 『철학적 편지』는 권력자들의 심기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고 에밀리 역시 언짢게 만들었다. 유럽의 으리으리한 궁전들과 화려한 살롱들을 누비고 다니는 삶에 익숙했던 에밀리는 볼테르에게서, 자기와 완전히 다른 어떤 급진적인 과격함을 발견하곤 했다. 그녀는 자기가 사랑하는 이 남자로부터 벌어지는 일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불안한 마음을 안고 며칠 동안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씩 그의 입장과 생각을 이해하게 되었다. 볼테르는 사회적 지배층이 군림하고 있던 그 시대에 안락한 모습으로 살고 있던 귀족 계층의 사람들, 즉 그녀가 성장했던 귀족 계층의 사람들과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그는 하루빨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어영부영 낭비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영국에 추방되어 있다가 고국에 돌아온 볼테르는 여전히 프랑스의 군주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느꼈던 것들을 토대로, 관용의 나라이자 프랑스의 악습을 갖고 있지 않은 그 나라를 찬미하는 듯한 글을 썼다. 에밀리는 볼테르처럼 급진적으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는 그의 급진성에서 어떤 아름다움까지 감지하곤 했다. 플라톤의 말은 역시 옳았던 것이다. 사람이 사랑을 하지 않지 않은 채로 나와 타인의 차이점을 가깝게 경험할 수는 없다. 이제 결말이 남았다. 일생일대의 로맨스가 막을 내린 이후에 에밀리의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볼테르는 자기의 연인이 쌓아올린 업적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그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녀의 연구를 이어갔다. 덕택에 그녀가 번역했던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는 하나의 챕터라 할 수 있을 만큼 자세한 주석이 달리게 되었다. 철학자 볼테르는 그 책에서 전개된 몇몇 주장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출판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녀의 죽음조차 그의 열정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렇듯 타인은 우리가 타자성의 경험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존재이다. 위대한 문학 작품들과 위대한 그림들, 또 위대한 영화들의 공통적인 속성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 속성은 주체로서의 우리가 평소에 머물던 일상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게 만든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것일지 모른다.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고 다른 감성으로 느끼게 될 때, 이 세상은 다른 모습으로 관찰되고 경험될 수 있으니 말이다. 또한 이 속성은 우리로 하여금, 화가의 붓질과 작가의 팬, 영화감독의 카메라를 통해, 우리가 한 세계의 탄생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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